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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7(월) 목회자세미나-모리아산으로 가라/이은환목사
관리자 2019-10-08 추천 1 댓글 0 조회 571

오늘 우리들은 이 산을 통해서 배우는 교훈이 많이 있는데 영적인 교훈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산을 통해서 나타낸 역사도 많습니다.

 

산에 자주 다니십니까? 저는 산에 자주 못 가는데 산이 너무 좋습니다. 우선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죠?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대자연의 신선한 공기도 호흡할 수 있죠?

 

그것뿐만 아니라 세상에선 모르다가 산에 올라가보면 어찌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품이 아름다운지요? 그곳에 가면 하나님이 조금 가까이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오순도순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영적 대화가 가능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중요한 이야기하실 때 산에 가셨습니다. 산에 가셔서 유혹도 당했습니다. 산에 가셔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산에 가셔서 죽기 전에 피눈물나게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

 

오늘처럼 하얀 얼굴로 변모하는 장소도 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산에서 죽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부활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자기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최고의 높은 정상에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최 고의 축복을 받은 역사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 신을 섬겼던 가문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습니다(창12:).

 

그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갑니다. 그런데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그의 나이는 이미 75세, 아내 사라의 나이도 65세인데 자식이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그의 믿음이 흔들립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그를 단련하시고 신앙을 성장시켜 주셨습니다. 마침내 100세에 이삭을 낳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기대했던 신앙의 수준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나오는 대로 시험을 하셨습니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려가서 번제로 바치라는 겁니다. 그때 이삭이 10대였던 것으로 추정되니까 아브라함은 110세가 훌쩍 넘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로부터 40여년이 흐른 시점입니다. 다행히 아브라함은 이 시험에 합격합니다.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아브라함의 신앙이 정상에 올랐음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 후로 하나님이 그의 신앙을 성장시키려고 애를 쓰신 기록이 없습니다.

 

모리아 산 번제 사건이 그의 신앙의 최고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더 나아가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바리는 기대수준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게 신앙의 기준과 목표이다! 신앙이 이 정도는 돼야 한다! 그러므로 모리아 산은 이렇게 비유해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신앙의 최고봉!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신앙의 최고봉까지 올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우리에게 동일하게 제시된 신앙의 기준이요 목표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내어놓고 예배와 헌신의 절정을 경험했던 사건입니다.

 

▲모리아 산은

여기 '모리아'라는 뜻은 "여호와께 보여진다", 혹은 "여호와께서 보신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이 모진 시험과 고난의 산 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 곳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새롭게 만난 산, 하나님의 시선을 얻은 산이었습니다.

 

▲고난은 - 내 인생의 모리아 산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높은 시험의 산, 고난의 산으로 인도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곳이 나를 망하게 하는 산인 줄 알고 힘들어합니다.

 

그 곳이 나를 죽게 하는 산인 줄 알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오르는 시험의 산은 그것이 무엇이든 이제는 내 안경과 내 시선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시선을 얻는 내 인생의 모리아 산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을 모리아 산, 그 고통의 산으로 인도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속 마음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Ⅰ. 그 일 후에 오늘 본문은 "그 일 후에"라는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가정에 "그 일" 이 무엇입니까?

 

21장에 이스마엘과 그 어미 하갈이 빈들로 쫓겨나 통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종에게서 얻은 아들이지만 그도 내 피를 타고난 아들입니다. 아들과 그 어미를 빈들로 쫓아낸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바로 "이 사건 이후에" 그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겨우 정신을 차리는 순간 이번엔 독자 이삭까지 바치랍니다. 무서운 카운터 펀치가 날아왔습니다.때문에 성서학자들은 신약 최대의 사건이 갈보리 십자가 사건이었다면 구약 최대의 사건은 모리아산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큰 시험을 주신 이유는 큰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깨닫기까지 시험은 고통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지요.예>어느 양계업자가 들판에 나갔다가 독수리 알 하나를 주워왔습니다. 독수리 알을 달걀과 함께 부화시켜 병아리들과 함께 키웠습니다.

 

그런데 이 독수리 새끼는 병아리와 꼭 같이 행동을 합니다. 주인은 독수리를 날게 해 보려고 양계장 지붕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비틀거리며 지붕에서 떨어지고 맙니다.

 

어느날 주인은 새끼 독수리를 데리고 높은 절벽 위로 올라갔습니다. 벼량을 향해 내어 던졌습니다. 처음에는 비틀비틀 떨어지더니 조금 지나자 독수리는 양쪽 날개를 활짝 펴고 날기 시작했습니다. 힘차게 힘차게 창공을 향해 날아올랐습니다.독수리의 성공은 높은 절벽 위에서만 가능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험하고도 높은 벼랑위에 세울 때가 있습니다.

 

절벽을 향해 던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우리를 멸망시키는 장소가 아니라 푸른 창공을 향해 날아 오를 수 있는 새 출발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날 아브라함을 잔인하리만큼 높은 벼랑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절)II. 하나님의 “놀라운 명령”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아브라함에게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재산이 귀했겠습니까? 이제 와서 건강이 귀했겠습니까? 명예가 귀했겠습니까? 독자 이삭입니다.

 

가장 귀한 것, 생명 보다 귀한 것 -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중심자리에 "내가" 앉아 있기 때문에 우리의 중심 자리에도 하나님이 앉아 계시길 원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시험의 현주소가 있습니다. 1. 본문 2절에 보면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내 것 - 내 것이라고 주장했던 모양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험이요 우상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이삭을 얻을만 해서 얻은 아들이 아닙니다. 생식기능이 단절된 상태에서 얻은 아들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요 복입니다.

 

인류역사상 최초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 앞에서 생식기능의 단절을 선언하는 예식이었습니다. 즉 "나는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자이다. 그런데 이삭을 얻었다. 그러므로 이삭은 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삭을 끊임없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치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 자식 하나님이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철없는 아이에게 사탕봉지 맡기고 나면 아빠가 하나만 달라고 해도 "내 꺼야" 소리치며 사탕봉지를 뒤로 감춥니다. 누가 준건데? 인간의 사악함이 이렇습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내 것이란 존재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그 무엇을 내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요 시험입니다.

 

하나님께 그것을 바치기전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신앙없이 그 무엇을 받아도 그것은 복이 될 수 없었습니다.2.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땅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 하나 뿐인 것 - 바로 아브라함의 급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치셨습니다. 잔인하게 느껴지십니까? 그러나 신앙생활에 이 급소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다음 복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① 물질의 급소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 이 사람은 언제나 물질 때문에 시험에 듭니다. 이 물질의 벽을 넘어서기까지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② 이성의 급소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늘 이성의 유혹이 크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③ 어떤 습관의 급소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④ 자존심, 명예 - 인간 누구에게나 급소가 하나씩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아킬레스근이 십자가의 피에 적셔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치라고 말합니다. 짤라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그 자녀에게 축복의 새싹이 돋아납니다. Ⅲ. 순종하는 아브라함1. 아침에 일찍이 아브라함을 보십시요. 3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아브라함도 인간이었습니다. 때문에 간밤엔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며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침이 밝아오자마자 머뭇거리지 아니하고 순종에의 길을 나섰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이 즉각적인 순종이 시험을 이겼습니다.참된 순종은 깊이 생각한 후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한 다음 생각하는 것입니다. 갈 길이 보이지 아니하고 미래에 대한 보장이 보이지 않아도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온 생 - 이것이 아브라함의 인생길이었습니다.사랑하는 아들을 죽여야되는 아비의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날 밤은 몇 년처럼 길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 인줄 알아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순종을 드리기 위해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람을 봅니다. 그런가하면 그는 나귀에 실고 갈 물건들을 준비합니다. 장작을 쪼개는 노족장의 모습을 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환과 노족장이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장작은 갈기갈기 찢기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식을 죽여야되는 아비의 마음보다 더 모질게 갈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떠나면서 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사라와는 의논하지 않습니다. 아마 의논했으면 "나 죽이고 데려가라!"고 소리 지르지 않았겠습니까?

 

저 같으면 가족의 극성스런 만류 때문에 순종하지 못했노라고 핑게라도 하고 싶었을 겝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에 행여 걸림돌이 될만한 일은 상식적인 일마져도 포기를 했습니다. 핑게 거리조차 만들지 않았습니다. 2. 사흘길 순종은 순간적인 결단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할 아들의 손을 붙들고 사흘길을 걸어야 하는 고통의 길이었습니다. 모리아산은 브엘세바에서 45km정도 떨어진 곳이니 걸어가면 아마 3일쯤 걸릴 것입니다. 온전한 순종을 위해서는 삼일간의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사흘길 걸어갈 때 합리화시킬 명분을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아니 내가 이스마엘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자손을 펼치겠다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하는 말이 사실인가?

 

암탉 한 마리도 독수리가 새끼를 덥치려고 들면 자기 몸을 날려서 새끼를 구하거든 만물의 영장인 내가 어찌 자식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 아이를 통해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하나님의 자손을 편만케 해주신다고 약속했는데 이 아들이 죽으면 그 약속이 깨진다.

 

그런고로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내가 얼마나 지혜로운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려야겠다.' 그리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광야 길 가는 아브라함을 스펄젼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헤브론 광야길은 적막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식을 죽여야 하는 아비의 마음보다 적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순종하여 떠나는 길에 인내력이 부족하여 도중에 돌아선 불순종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인류역사상 정상에 오르기 바로 직전에 돌아선 못난 발걸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순종은 인내와 끈기로 완성이 됩니다. 순종은 변덕이 없어야 순종입니다. 믿음은 끝까지 마무리 되어야 믿음입니다.신앙생활은 곧 순종의 생활입니다. 자기 논리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요. 자기 생각과 느낌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흘 길을 마치고 모리아산 아래 도착하자 하인들을 떼어놓습니다.3. 종을 떼어 놓고 저 같으면 하인들도 데리고 올라갔을 것 같아요. 그래서 모든 일을 결행할 준비를 하고 이삭을 눕혀 결박해서 묶습니다.

 

그 때까지는 하인들은‘영감님이 요즘 참 이상하게 행동하신다’고 생각하며 보고 있다가 드디어 아브라함이 제사용 칼을 듭니다. 제사용 칼은 한 쪽에만 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 면에 다 날이 있습니다.

 

먼저 심장을 찢어 위로 올렸다가 밑으로 잡아당기기 때문에 보통 칼은 한 쪽에만 칼날이 있지만 이 제사용 칼은 양쪽날이 예리하게 서 있습니다. 그 칼을 뽑아들자 하인들은 '칼을 꽂을 제물이 어디 있지 찾는데' 제물이 안보입니다. 그런데 이삭을 향해서 그의 칼이 향하자마자 옆에 있는 하인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몸을 날려서 아브라함의 손을 붙잡습니다.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한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 영감님 치매다. 노망이다." 아브라함의 나이 120쯤되었으니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요. 이쯤되면 아브라함은 이렇게 핑게 댈 수가 있습니다.

 

"저야 바치려고 했지요, 그런데 저 배운데 없는 불학무식한 하인놈들이 하나님의 뜻을 그르쳤습니다." 저 같으면 이런 핑게를 댔을 것 같아요.그러나 아브라함은 방해가 될만한 모든 일들을 철저히 제거합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큰 그릇입니다. 4. 어린양은?아브라함은 걸림돌이 될만한 모든 장애물을 다 제거하고 사흘길까지 무사히 마쳐 모리아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지금까지 모든 승리를 수포로 돌릴 수 있는 한 펀치가 날아옵니다.

 

바로 이삭의 이 한마디였습니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지금까지 참고 참아 왔던 아버지의 심정의 뇌관을 폭발시킬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뭐라고 말합니까? 비수를 꽂는 질문입니다.

 

“너다”라고 할 수도 없지만 아브라함이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 말은 “그 입 다물라!”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자기를 위하여"라고 했습니다만 원문에는 "위하여"라는 말이 없습니다. 정확히 번역하면 "여호와께서 자신을 준비하시리라"입니다.

 

이 말은 위대한 예언이 되었습니다. 이삭이 장작더미를 짊어지고 모리아 산에 오르듯이 - 하나님의 아들이 등에 나무를 지고 모리아산, 골고다 언덕을 오르고 있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여기 죽으러 가는 이삭은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언덕 정상에 오른 아브라함은 장성한 아들을 들어 장작더미 위에 눕힙니다.스펄전 목사님은 이 장면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늙은 아비가 장성한 아들을 들어 올릴 때 몹시도 무겁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을 죽여 바치기 위해 그 자식을 들어야 하는 아비의 심정만큼 무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황급히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Ⅳ. 하나님의 속마음

 

드디어 아브라함은 알고 싶었던 하나님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 수 없었던 하나님의 마음이 순종함으로 아들에게 칼을 내리꽂으려 했던 그 순간에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삭이라는 제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학증 환자처럼 우리가 고통받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제거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의 가슴에 있는 종양이었습니다.

 

⓵종양을 제거하라

종양은 그대로 두면 자신의 삶 전체를 치명적으로 몰고 갈 수 있고 암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악성종양은 제거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여기에서 종양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에게는 100세에 낳은 이삭에 대한 끔찍한 사랑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단어는 간단하게 취급하고 넘어갈 단어가 아닙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좋으나 그 사랑에 빠져 하나님이 희미해져 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삭은 100세에 낳은 독자였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러지 않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삭은 점점 아브라함의 마음을 차지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삭이 자라갈 때 기쁨이 넘쳤을 것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독차지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요구는 언제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입니다. 여기에서 충돌이 일어납니다.

 

너무 강한 애착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집착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종양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놓쳐 버리고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할 수밖에 없게 만들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높이 치켜든 칼은 의사의 집도였습니다. 자세히 보면 그 칼은 이삭을 향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아브라함 자신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칼을 아브라함에게 쥐어주신 것입니다. ⓶네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든 칼로 너의 가슴의 종양을 스스로 제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속한 순종과 하나님의 중지명령이 숨 가쁘게 교차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종양은 제거되고 하나님의 치유가 선포됩니다. “너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자라고 있던 종양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입니다.

 

부르심을 받고 모든 것을 포기했던 아브라함에게 조금씩 자라났던 하나님 외에 다른 안정감과 기쁨을 주었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포기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무언가 끼어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것, 하나님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우리의 이삭은 무엇일까요? 우리 삶에는 이런 이삭이 찾아옵니다. 자녀일 수도, 물질일 수도, 자아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에 관심을 두고 예의 주시하십니다.

 

그것에 대해 하나님의 질투에 넘치는 집념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점검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테스트에서 통과합니다. 순종의 산물은 컸습니다. 한 숫양이 수풀에 걸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대기시켜 놓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대신하여 숫양을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심”이라고 합니다. 숫양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창세기 22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뜨겁게 살아 있습니다. 이삭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부활의 경험입니다. 이삭 대신 죽은 제물은 숫양입니다.

11절-12절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

 

놀라운 사실은 순종의 순간에 갈 때까지도 알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도무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순종함으로 드러납니다.

 

영적 비밀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우리의 지성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아무나 아는 것이 아닙니다.

 

화려하고 좋은 말은 아무리 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공부만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순종이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에 감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순종에 감동하십니다.

 

이제야, 이제야! 자기의 마지막 우상, 그리고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이 순간까지 그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없고 그의 신앙을 참된 신앙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사랑은 감정으로 측량되는 것이 아니고 말로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헌신과 순종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당신의 "이제야"가 무엇입니까? 당신에게 마지막 남은 우상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이제야는 어느 순간, 어느 때 입니까? 언제까지 머뭇거리시겠습니까?Ⅴ. 여호와 이레 자식도 죽이고 자기도 죽어 하나님께 바치려는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죽이셨나요?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이레」 제물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여호와 이레’는 무슨 뜻이냐?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신다’(God sees)는 의미와 ‘하나님이 공급하신다’(God provides)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배운 교훈은 하나님이 보시고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내가 무엇을 아끼겠는가?” 하나님 아버지의 솔직한 마음을 느껴보실 수 있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봇물이 터지듯 흘러넘쳐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좋은 것이 있으면 빼앗아 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울고불고, 안달복달하면 겨우 주시는 인색한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미리 준비하시는 분이십니다. 가끔 우리는 하나님을 굼뜬 분으로 여길 때가 있는데 하나님이 느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느립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앞서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받을 준비만 하면 여호와 이레 하나님은 언제나 예비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이 순종을 보였던 여호와의 산에는 숫양이 대기 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위해 예비하십니다. 우리의 편에서 먼저 모리아에 오르는 믿음의 순종이 선행될 때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도 그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미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백성들이 완악하고 불순종하여 40년을 광야에서 보내며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 냅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여호와 이레의 축복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한 십자가 사건을 통해 구체화 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속마음이 드러납니다. 모리아로 올라갈 때 아브라함의 마음, 칼로 아들을 내리칠 때의 아브라함의 마음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로마서 8장 32절“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아끼셔서 아들을 내어놓기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로 올라갈 때 희미했던 하나님의 마음이 갈보리에서 완전히 드러나셨습니다. 아들을 바치라고 하던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셨습니다.

 

그 아들을 죽이라는 명령은 쉽게 순종할 수 있는 명령이 아닙니다. 찢어지는 고통을 동반하는 순종을 해야 합니다.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과하고 난 다음에 주어지는 축복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공급자가 되십니다. 어떤 것도 아끼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우리 삶에는 더 이상 결핍은 없습니다.

 

바울은 그 모든 것을 얻고 난 다음 그 포만감 때문에 세상의 어떤 것도 붙들지 않고 배설물로 여기겠다고 한 것입니다. 모리아에서 아브라함의 순종을 통하여 숫양을 통해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주셨던 은혜가 갈보리 언덕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계신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생의 결론입니다. 아브라함은 현실보다 말씀을 중요시했습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제나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어디서? 여호와의 산에서입니다. 아무 산에서나 바치면 되는게 아닙니다.

 

본문 2절에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입니다. 그곳이 여호와의 산입니다. 여호와의 산 - 모리아가 어디입니까? 이삭이 바쳐진 자리요 예루살렘 성전이 선 자리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죽으신 자리입니다.

 

바로 여기입니다. 사명의 자리입니다. 여기가 여호와 이레의 자리입니다. 여러분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시다. 올라왔으면 죽어지세요. 하인처럼 산아래 있지 마십시요. 주변을 맴돌지 마십시오.

 

먼 산만 바라보고 서 있지 마십시요. 여호와 이레의 축복은 구경꾼을 위한 축복이 아닙니다. 이삭처럼 말씀의 칼을 몸에 지니세요.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요. 여호와 이레 - 내가 나를 위해 수양을 준비했느니라. 할렐루야. Ⅵ. 모리아 산에서 걸작품을 만드시는 하나님이 22장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것은 "지난 50년 동안 이 아브라함, 허물과 실수와 연약한 부분이 많은 이 아브라함을 내가 만들고 새로 다듬고 조립하고

 

내가 연약한 부분을 내가 새롭게 갈아끼워서 어떤 사람으로 어떤 존재로 바뀌었는지 내가 만든 걸작품을 너희들이 한번 보라" 하고서 시험하시는 시연장이 바로 이 모리아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리아산의 결과는 처음부터 결과가 뻔합니다. 왜냐구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아브라함을 다듬으시고

 

또 그 아브라함을 잘 만드셔서 아들까지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신 그 창조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22장을 읽으면서 아브라함 대단하다 그렇게 보시면 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을 아브라함되게 하신 하나님이 대단하시다 우리가 그렇게 보아야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제 가슴이 뛰고 또 뛰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하나님께서 나의 허물과 나의 연약한 부분, 내가 실수할 때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나를 책망하시고 나를 때리시고 나를 징계하셨다면은 나는 오늘 이 자리에 설 수가 없어요.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신앙생활을 지금까지 해오면서 목사입네, 강도사입네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산 부분이 있습니까?

 

얼마나 반복적으로 습관적인 죄들을 범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드린 때도 많습니까?

우리가 평소에 성경을 제대로 읽습니까? 기도생활을 제대로 합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보실 때에 우리는 엉망진창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고 그 때마다 회초리를 드시고 우리를 때리신다고 하면은 여기에 정상적인 사람, 한 사람도 없을 거에요. 전부다 하나님앞에서 징계를 받은 상처들 뿐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나와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다듬으시사 모리아산에 설 수 있도록까지 만드셨듯이

 

오늘도 우리 배후에서 우리를 다듬으시고 그때까지 참으시고 인내하시면서 우리를 기대하시며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자기의 독자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셨듯이 우리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 분명히 만들어 줄줄 믿습니다. 나는 지금 엉망이고 나는 지금 부족하고 나는 지금 허물이 많은자이지만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붙잡으시고 아브라함을 아브라함되게 하셨듯이 우리 하나하나를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은혜와 이 놀라운 사랑과 이 감격과 하나님의 손길을 창세기 22장에서 우리가 발견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22장 앞에서 아브라함을 다듬으시던 하나님의 손길을 다시 한번 바라보면서 "주여 여기까지 인도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내 힘과 내 능력과 내 의와 내 공로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모리아산의 아브라함이 주께서 나도 되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산인 모리아는 세상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산입니다. 모리아산은 돋보기 산입니다. 돋보기로 보면 작은 것이 크게 보입니다.

 

돋보기 산인 모리아의 관점으로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은 크게 보이고 나의 문제는 작게 보입니다. 그러나 나의 안경으로 보면 하나님은 작게 보이고 문제만 크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안경은 참으로 신비합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보입니다. 문제와 고난과 환란은 시시하게 보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만 위대하게 보입니다. 그분만 크게 보입니다.

 

세상을 다 얻고도 예수를 잃으면 그것은 망한 인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도 얻어야 할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시선, 그것은 세상을 내려놓고 내가 얻어야 할 신앙의 절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오염된 눈을 내려놓으십시오. 죄로 물든 내 안경을 벗어버리십시오. 하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는 모리아 산인 이곳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의 안경을 쓰고 내려가십시오. 그 길만이 여러분이 사는 길입니다.

 

 

 

Ⅰ. 그 일 후에

II. 하나님의 “놀라운 명령”

Ⅲ. 순종하는 아브라함

Ⅳ. 하나님의 속마음

⓵종양을 제거하라

⓶네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Ⅴ. 여호와 이레

VI. 모리아 산에서 걸작품을 만드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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