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신 후 갈릴리로 돌아오셨을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릴리로 돌아 오셨는데, 사람들이 한 사람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보니 그 사람은 귀가 먹었고 말이 어눌한 사람이었습니다. 귀가 먹으면 말이 어눌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그 사람에게 안수해서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로부터 떠나가서 고쳐주십니다.
본문에 고치시는 행위가 다른 본문에서와는 다르게 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33절이지요. 손가락을 양쪽 귀에 넣으십니다.
그리고 침을 뱉으세요. 그리고 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에바다." 에바다는 "열리라" Open up 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됩니다. 귀가 열려서 들을 수 있게 되고, 들으니 말하는 데에도 문제가 없어지지요. 혀의 맺힌 것이 풀려서 말이 분명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귀먹고 말 못했던 사람이 귀가 뚫리고 말을 분명히 하게 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모두 1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열 여섯 장 전체에서 오늘 본문은 거의 중간 부분에 해당되는 본문입니다.
마가복음 전체는 크게 1장부터 7장까지의 전반부와 8장부터 16장까지의 후반부로 나누어집니다. 전반부는 대부분 주님이 행하신 기적을 다루고 있고,
후반부는 대부분 제자 열 둘을 중심으로 한 제자 양육을 다루고 있어요. 이런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오늘 본문은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하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반부의 기적을 끝맺음하면서 후반부의 제자 양육으로 넘어가게 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견지에서, 오늘 본문은 귀가 먹고 말이 어눌한 사람을 고치시는 기적이지만,
그 기적은 결코 기적 그 자체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자의 삶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기적입니다.
즉, 귀가 열리고 말이 분명한 삶, 제자는 영적 귀가 열려 있어야 하고 말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믿으세요. 귀가 열려 있고 말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고쳐주신 특이한 행동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첫 번째는 양 귀에 손가락을 넣고 혀에 침을 바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치료의 방법이었습니다. 의사들도 종종 그런 방법을 사용했고, 민간요법에서도 그 방법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말씀 한마디로도 병을 고치실 수 있는데 왜 그런 방법을 사용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고침받아야 할 그 사람의 환처에 손을 대심으로 그 사람과 특별한 인격적인 교류를 하신 것입니다. 그건 그 다음에 나오는 특이한 두 번째 행동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특이한 행동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는 것입니다.
말씀 한 마디로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는 것은 지금 그 병자가 안고 있는 고통을 예수님께서 깊이 통감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그 고통을 함께 느끼신 것입니다. 그 병자를 보시자 예수님은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마음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탄식을 토해낼 만큼
마음이 아프셨던 예수님께서 그를 직접 손으로 만져주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면서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를 향하여 “에바다”라고 외치셨습니다.
‘에바다’라는 말은 아람어인데, 그 뜻은 ‘열려라’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막힌 귀야 열려라’ ‘굳어 어눌해진 혀야 풀려라’ ‘귀먹고 어눌한 고통의 자리에서 해방되어 자유함을 얻으라’ 그런 뜻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듣게 되었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병자를 고쳐주신 짧은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들의 영적인 상태가 과연 어떠한가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열려라’ ‘해방되어라’ 라고 외치신 이 주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들의 닫혀 있는 것들을 열어주는 놀라운 능력의 말씀으로 들려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를 향하여 ‘에바다 - 열려라’ 라는 음성이 들려질 때 아직까지도 막혀져 있던
우리들의 영적인 상태가 열리게 되는 것이 ‘에바다의 신앙’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는 사랑하는 모든 교우님들에게 오늘도 주님께서 “에바다 - 열려라” 하신 말씀이 들려짐으로
아직도 맺혀져 있는 것들과 어눌해서 고통을 주는 모든 삶의 문제들과 영적인 상태가 열려지는 귀한 역사가 베풀어지기를 축원합니다.그러면 무엇이 열려야 합니까?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열려라 - 에바다 하실 때 우리의 무엇이 열려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닫혀진 세상을 열기 위하여 열면 닫을 자가 없는 주권자의 열쇠를 가지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였습니다(계3:7).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세상은 닫혀진 세상입니다. 그것은 캄캄한 밤이고, 춥고 음산한 겨울이며 또한 그것은 복음의 빛을 받지 못한 율법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어두움과 사망의 그늘 아래서 생명의 통로가 차단된 인간들 속으로 예수님은 「에바다」의 비젼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1:5에 보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하고 물어오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 앞에 있는 귀먹고 어눌한 자가 되어 「에바다」의 신비를 맛볼수 있기를 바랍니다.
Ⅰ. 닫힌자의 불행 여기 "귀먹고 어눌한 자"는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는 자로서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외모를 보아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이목구비(耳目口鼻)가 갖추어져 있는데도 안으로 그 기능을 상실한 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이 있다면 외부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나만의 폐쇄된 공간. 닫혀진 공간안에서 혼자서 외로워하다가 외롭게 죽어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런 유형의 한사람을 만났습니다.그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장애인중에서도 중증의 겹쳐진 불행을 앓고 있었던 장애인이었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말도 어눌한 거의 언어를 잃어버린 그래서 말이 거의 불가능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고통가운데 살고 있었던 사람.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한. 완전히 외부세계와 단절된 상태 속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이끌리어 예수님 앞에 나 왔습니다.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긍휼과 연민으로 이 사람을 쳐다보시다가 유명한 말 한마디를 하셨습니다.
아람어로 에바다 본래 댐파다 라는 말에서 나온 말인데요. 열려라. 열려라. 이 한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사람의 귀가 열렸습니다. 또 입술이 열렸습니다. 그는 듣기 시작했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인생이 열려진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장애보다도 훨씬 더 불행한 장애가 있다면 그것은 정신적 장애, 영적인 장애입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지금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 얼마 많습니까?
또 보지 못하는 사람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꽉 차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늘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답답하고 자기 우물의 폐쇄된 인생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자기들의 철학이 최고라고, 자기들의 경험이 제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들이 들어야 할 음성이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이요, 그들이 바라 보아야 할 빛은 하나님의 영광인데 그것을 보직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창조하신 그 분이 이 어두어진 세상 속에 오셔서 이 세상을 다시 한번 치유하고자 하십니다.
세상을 창조했던 동일한 말씀의 권능으로 이 귀가 멀고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와 영적으로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에파타"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을 듣는 이마다 귀가 열릴 것입니다. 가슴이 열릴 것입니다. 삶이 새롭게 될 것입니다.Ⅱ. 열게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닫힌 것을 열어 놓으시는 분입니다. 막 7: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동네 사람들이 이 일을 보고 심히 놀랐다. 그리고 예수님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바로 선지자 이사야의 말한 바 예언의 성취인 것이다. 이사야가 이렇게 예언했었다.사 35: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며, 장애를 회복시키시는 능력의 선지자에서 멈추지 않는다. 우리의 눈과 귀가 열려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되심까지 알아야 한다. 그분은 약속의 성취자로 오신 메시야 되시며 우리의 진정한 도움이 되시는 분이시다.
(1) 듣지 못하던 우리의 귀가 열려야 합니다. 여러분,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 리모컨에 ‘음소거’라는 버튼을 눌러놓고 앉아 있어보세요. 화면은 자꾸 바뀌고 사람들의 입은 움직이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면 신경질이 나서라도 텔레비전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요즘은 자막도 나오기도 하고 어떤 뉴스는 수화로 내용을 알려주기도 합니다만, 그런 것이 없이 화면만 보고 있다면 내용을 제대로 알 수가 없어 답답할 것입니다.
텔레비전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화면이라도 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예전처럼 라디오 시대라고 한다면 라디오는 켜 놓았는데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그건 라디오를 켜놓으나 마나 아닙니까?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고 비극인지 모릅니다.예수님께서 ‘에바다 - 열려라’ 그러시면서 병을 고쳐주신 그 병자는 아무 것도 듣을 수가 없었던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에 대한 소문도 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가서 내 병을 좀 고쳐달라고 하소연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듣지 못하니까 예수라는 분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그 주변에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그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에바다 - 열려라’라고 말씀하실 때에 귀가 열려서 듣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듣지 못하는 비극적인 삶을 살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귀가 막혀서 듣지 못하는 이 불쌍한 사람처럼, 현대인들 가운데서 귀가 막혀서 듣지 못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귀머거리가 아니라 양심의 귀머거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이 시대의 절규와 아픔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죄악이 속삭이는 소리는 그렇게도 잘 들으면서 죄를 책망하는 양심의 소리에는 무디어져 듣지 못합니다.
어디 양심의 귀머거리만 있습니까? 영적인 귀머거리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영적인 귀머거리들은 거룩한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성경을 읽어도 그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기도를 해도, 말씀을 묵상을 해도 그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 신령한 음성을 듣지 못한 채 귀머거리로 살아갑니다.
말씀을 듣겠노라고 예배당에 나와 앉아 있지만, 오늘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예배당을 떠나가는 사람들이 바로 영적인 귀머거리들입니다.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은 세미한 음성이었습니다.(왕상 19장) 바위를 부술 정도로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삼켜버릴 엄청난 지진 가운데도 하나님의 음성은 없었습니다. 강한 바람과 지진이 지나간 후에 하나님은 음성의 세미하게 엘리야에게 들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세미한 가운데 말씀하십니다. 귀머거리에게는 세미한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육신의 소리, 생리적인 소리, 세상의 소리는 잘 들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이나 영을 깨우는 소리는 귀에 들리지 않는 영적인 귀머거리는 아닙니까?
우리가 영적인 귀머거리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어떤 말을 하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살면서 하나님 이야기, 은혜 받은 이야기, 성경 이야기, 교회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만 한다면 우리는 영적인 귀머거리입니다.
내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으니까 영적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맨날 세상 이야기, 남들 흉보는 이야기, 쓸데없는 이야기들만 하고 살아갑니다.
영적인 귀머거리들은 진짜 들어야할 영적인 소리에는 전혀 무감각합니다. 영적인 소리에 무감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
조그마한 어려움이나 장애물을 만나도 좌절하고 절망하기 일쑤입니다. 영적인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늘 불평하고, 원망하고, 불신하게 됩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다 영적인 귀머거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어떤 부부가 아이가 없어서 하나님께 아이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정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무려 16년 동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16년 만에 기도의 응답을 받아서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도 기도하며 기다리던 아이를 낳고 보니까 불구였습니다. 정상적인 아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부부는 너무나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이 부부는 아이를 낳아 놓고는 별의별 생각을 다 해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하면서도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고, 어떻게 생각하면 서운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산다고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런 상황이 되면 고민하게 됩니다. 여기에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같긴 한데, ‘과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거기에 대한 응답을 듣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뜻을 감추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들을 귀가 막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적인 귀머거리로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알려주심에도 그것을 듣지 못하고 답답하게 고민하며 살아갑니다. 이 부부도 근심하면서 “하나님, 이게 웬일입니까? 16년 동안 기도해서 얻은 아이인데 왜 불구여야 합니까?” 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속에 감동이 왔습니다.
감동된 마음속에 깊이 들려온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 불구아를 누구에게 맡겨야 사랑을 쏟아가며 키워줄 수 있을까 하고 16년 동안이나 찾다가 너희 부부에게 맡겼노라.
너희 부부처럼 기도하고 준비한 사람들이라면 이 아이에게 온갖 사랑과 정성을 쏟아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란다.”하는 음성이었습니다.
이 부부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서야 일순간에 의심과 불평이 사라지고 자신들에게 이 아이를 주신 것에 감사하며 아이를 키웠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귀가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는 민감하고 육신의 소리는 잘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은 듣지 못하는 영적인 귀머거리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치가들이 귀가 어두워서 민중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아집에 빠지거나 독재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위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면 세속적인 사람이 되고 영적인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귀먹은 사람을 붙잡고 탄식하시며 ‘에바다-열려라’ 하시며 치유해 주셨던 주님의 은혜가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영적인 귀가 열려 신령한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믿음의 승리자들로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음성을 들어야 우리 삶에 둘려 싸여있는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2) 입을 열어주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언어 장애를 갖고 있었습니다. 혀가 굳어서 말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혀에 침을 바르시며 풀어주시자 굳었던 혀가 풀리고 정상적으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독재자들이 자신의 정권을 위해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언론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언론을 장악해서 사람들의 입과 귀를 막아 놓고는 자신들의 입장만 대변하도록 하고서 독재정치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벙어리 아닌 벙어리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참 잘하면서 정말로 꼭 해야할 말, 꼭 필요한 말은 하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유혹을 받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과 꼭 해야 할 말을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고, 특히 다른 사람을 ‘흉보는 말’이나 ‘비판하는 말’ 하기를 참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하면서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 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말과 하라고 하신 말을 구별하지 못하고 내 생각대로 내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이 옳은 말인지, 정당하고 덕을 세우는 말인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 자존심을 짓밟는 언행을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입에는 덕을 세우는 말, 칭찬하는 말, 유익하고 은혜를 주는 말, 사랑한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이 훨씬 더 많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시인과 같은 기도를 날마다 드려야 합니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더러워진 우리 옛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세상적인 말이나 악한 말을 버리고, 진리를 전하는 말, 의로운 말, 덕을 세우는 말, 평강과 축복을 비는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남을 험담하는 말이 머리에 떠오르면 하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 법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시인과 같은 기도를 드립시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그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아름답고 복스러운 말을 많이 하도록 우리의 입술에 ‘에바다’의 축복을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굳게 닫혀진 마음을 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은 듣지 못하는 귀, 말할 수 없는 입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마음이 닫혀져 있다는 것입니다.
귀머거리가 되어 듣지 못하고 벙어리가 말하지 못하는 것도 비극이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비극은 마음을 닫고서 산다는 것입니다.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기만 해도 자기를 흉보는 줄로 알고 마음을 닫아버린 채 살아갔던 것이 주님 앞에 이끌려온 이 사람의 삶이었습니다. 사람이 마음의 문을 닫고 살면 그것보다 불행한 것이 없습니다. 이웃끼리 교류가 되지 않고,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닫고 살면 하나님과도 영적인 교제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마음을 굳게 닫아놓고 ‘자기만의 성’ 안에 갇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구를 도우려고도 하지 않고 누구가의 도움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간섭하는 것도 싫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영역에 들어와 간섭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여러분! 사람들 사이에서 마음의 문이 닫혀버리면 하나님을 향해서도 마음을 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서로를 향하여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에바다의 축복을 받아서, 서로를 자신의 사랑의 품에 품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희망해 봅니다.
같은 집에 사는 가족들이 서로 마음을 닫고서 남남처럼 살아간다면 그보다 더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교회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오면 서로가 마음을 활짝 열고 사랑하고 교제하면서 가족 이상으로 마음이 통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행복한 신앙공동체가 됩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어서 와도 또 오고 싶은 교회, 헤어지면 언제 만날까 기대가 되는 성도들, 주일이 되어 교회에 가려고 하면 마음이 설레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심리학자 레오 버스카글리아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할아버지가 말기 암 진단을 받았는데 그날부터 성격이 매우 난폭해졌다.
식구나 주변 사람들에게도 욕을 퍼부었고, 아무도 만나지 않으려 했다. 의사와 간호사들에게도 사납게 대했다. 도울 방법을 찾다가 옛날 친구를 보냈으나 소용 없었다.
목사님도 욕만 먹고 쫓겨났다. 그런데 동네에서 할아버지와 가끔 만나던 어린 꼬마가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왔다.
2-30분 후에 어린 꼬마가 나온 후에 할아버지가 변했다. 꼬마에게 이유를 물었다. 어떻게 된거니? 아무 얘기도 안했어요. 할아버지하고 같이 울었어요.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울때 변화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체휼하시는 분이시다. 그분께로 나올 때 막힌 담이 무너지고 뚫어지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처럼 외롭고 답답하고 고통스러운가?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기대하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라.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만져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에바다!’ 열리는 역사가 있게 될 줄로 믿는다.
Ⅲ. 열린자의 복 욥기 22:21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닫힌 곳이 열려서 하나님과 교통이 이루어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화목하게 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에바다」를 명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귀가 열리고 입과 눈이 열리고 마음이 열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도 하늘 문을 열어서 신령한 복을 주십니다.
에바다는 생명입니다. 죽은 나사로에게 있어서 주님의 음성은 그를 죽음의 문에서 걸어나와 생명의 길로 걸어가게 하셨습니다.(요 11:43,44) 무덤의 문을 여셨다는 말입니다.
에바다는 이렇게 우리의 삶의 다양한 부분에서 역사하는데 형통함으로, 강건함으로, 문을 열어주심으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귀먹고 어눌한 자에게 에바다 하시니 열려졌는데 35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35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이 사람이 귀가 열리고, 또 입술이 열리고 그래서 듣기 시작했고, 말하기 시작함으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에바다의 기적을 체험합시다. ①주님께서 에바다 하시니 여러분들의 신령한 눈이 열려지기를 축원합니다. 신령한 눈이 열리면 자신이 정확히 보이고 천국이 보일 것입니다.
②주님께서 에바다 하시니 여러분들의 신령한 귀가 열려지기를 축원합니다. 귀가 열려야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을 수 있습니다.
③주님께서 에바다 하시니 여러분들에게 신령한 입이 열려지기를 축원합니다. 들을 뿐만 아니라 혀가 풀려 덕스러운 말 복음전파를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④주님께서 에바다 하시니 여러분들의 범사의 축복의 문이 열려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에바다라고 말씀하신 우리 주님의 귀한 음성이 오늘 우리들의 맺히고 닫혔으며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령들 위에 임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Ⅰ. 닫힌자의 불행 Ⅱ. 열게하시는 자 예수님 (1) 귀를 열게 하십니다. (2) 입을 열게 하십니다. (3) 눈을 열어 보게 하십니다. (4)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Ⅲ. 열린자의 복 ①주님께서 에바다 하시니 여러분들의 신령한 눈이 열려지기를 축원합니다. ②주님께서 에바다 하시니 여러분들의 신령한 귀가 열려지기를 축원합니다. ③주님께서 에바다 하시니 여러분들에게 신령한 입이 열려지기를 축원합니다. ④주님께서 에바다 하시니 여러분들의 범사의 축복의 문이 열려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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