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누가복음24:1-12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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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2025.04.20/부활주일/이은환 목사
누가복음 24장은 누가복음의 대단원으로 소망과 기쁨을 주는 예수의 부활 및 부활하신 이후의 사역과 승천이 그 내용입니다. 부활 사건은 십자가 사건과 별개의 사건이라기보다 밀접히 연결된 연속된 사건으로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특히 본문은 예수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이 천사로부터 예수의 부활 소식을 듣고 사도들에게 즉시 달려가 소식을 증언한 내용과 부활 소식에 대한 사도들의 불신적인 반응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서 ‘어찌하여’로 번역된 ‘티’는 ‘왜(why)’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자의 무덤에서 찾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 믿음의 현주소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봉사를 해도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참된 믿음으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기에 도리어 책망을 들을 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예수의 생애와 죽음까지 믿으면서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의 부활을 믿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살아나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그렇다면 천사들이 말한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지 말라’는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사망을 이겼나니
본문 2절입니다.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여기의 ‘굴러 옮겨진’은 원어로 ‘아포케퀼리스메논’ 인데 ‘돌이 이미 누군가에 의해 굴려졌다’는 사실을 밝히는 단어입니다. 누가는 신적 수동태를 사용함으로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나타내었습니다. 즉 무덤의 돌이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 옮겨졌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며 예수의 부활 또한 하나님에 의해 발생된 초자연적 사건임을 밝히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당한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바꿈표였습니다.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로 바꾸신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 부활의 현장인 무덤에서 찾아온 자들을 만나지 않으셨습니까? 이는 무덤과 상관이 없으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망 권세조차 예수를 가두어 둘 수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시체에 연연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시신에 향유나 바르면서 지난 일을 회고하는 무기력한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무덤을 여시고 사망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만방에 전하고 알려야 합니다.
둘째로 말씀이 기억나니
본문 6절입니다. “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여기의 ‘기억하라’는 원어로 ‘므네스데테’입니다. 누가는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언급하셨던 예언을 회상케 함으로 부활사건의 역사성과 하나님의 성취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기억할 내용은 누가복음 9장 22절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는 예수께서 하신 부활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인들이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좋은 성도라도 말씀을 잊어버리면 불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말씀을 잊고 느낌과 감정에만 의존하다 보니 부활의 역사가 눈 엎애 펼쳐졌는데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근심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기뻐해야 할 순간에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고 거듭 강조한 것입니다. 느낌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상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자들이 말씀을 기억하니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만져보지 않고서도 부활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체험이 아니고 말씀입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소망이 보이나니
본문 12절입니다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여기의 ‘놀랍게 여기며’의 원어는 ‘다우마존’ 인데 ‘기이히 여기다, 이상히 여기다’라는 뜻입니다. 누가는 여인들이 전한 예수 부활 소식을 듣고 불신하던 사도들과 달리 베드로는 곧 바로 무덤에 달려갔다고 언급함으로 부활을 확인하고자 하는 베드로의 열정어린 태도를 부각시켰습니다. 베드로는 비었는 무덤을 통해 부활의 소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무덤과 죽음에 안티(Anti)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무덤으로 향했다가 거기에서 달려 나오는 상황을 말합니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고, 고안해 낼 수 없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인간들은 무덤을 향해 절망적으로 달려가고 있는데 기독교는 무덤을 열고 나오는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슬픔의 반대말은 기쁨이 아니라 부활입니다. 부활만이 참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한 복판에서 부활의 체험이 나타나야 합니다.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계속해서 염려와 두려움이 있는 까닭은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있는 삶의 현장에서 사망을 이긴 부활의 흔적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말씀 속에서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소망을 주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 항상 승리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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