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오늘은 무슨 날입니까? 고난주일입니까? 정확하게 말해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 무슨 날입니까? 우리는 종려주일을 어떻게 보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날이 오늘입니다. 온 백성들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보려고 길가에 나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고 환호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은 주님께서 아주 특별한 왕이심을 온 천하에 알리신 의미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공생애 사역의 마감을 의미합니다.
본문 1절을 보면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라는 말씀으로, 예수님 무리가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감람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기간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사역을 하거나 복음을 전파하거나 말씀을 가르치거나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려고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고난 받으시고 자신을 내어 주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당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살펴보면서, 예루살렘 입성이 주는 영적인 교훈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주님은 신성과 주권을 가지신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능력과 권위와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모든 사실을 알고 말씀하셨는지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전지(全知)하신 신성과 주권을 가지신 왕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으셨고,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주권을 행사하는 왕임을 알기 원하셨습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는 모두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미리 나귀를 사서 준비해 놓았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주님을 흠모하는 사람이 제자들이 달라고 할 때에 기꺼이 내어놓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전지하시며, 왕의 권위로서 무엇이든 가지실 수 있는 주권을 행사하는 분임을 나타내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자들의 순종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기 어렵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인생의 최우선순위가 되었고,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라도 믿고 받아드릴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이끌어져 왔는지도 모릅니다.
예>요한계시록을 보면 예수님께 칭찬 받은 서머나 교회가 있는데, 그 곳에는 위대한 순교자 폴리캅 감독이 있습니다. 폴리캅 감독은 서머나 교회의 초대 감독으로 직접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에 대해 배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기만 하면 살려주겠다는 로마 사람들의 말에 굴하지 아니하고, “주님은 나를 84년 동안 한 번도 떠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떻게 주님을 부인하겠는가?”라고 대답하며 빌라델비아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장렬하게 순교했습니다. 신앙을 위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때문에 과감하게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작은 이권 때문에, 작은 쾌락과 만족 때문에 신앙을 바꾸는 경우는 없습니까?
주님은 만왕의 왕이시고 신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주권을 가지고 계신 분임을 알리기 원하시는데, 예수님을 확실히 알고 항상 주님 앞에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만왕의 왕 되심을 나타내셨는데, 우리의 삶 속에 주님을 인정하는 순전한 믿음의 고백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겸비하고 온유한 평강의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본문 4-5절을 보면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내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스가랴서 9:9를 인용한 것으로 이 땅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의 예루살렘 입성을 나타낸 것으로, 이 예언이 실제로 성취되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5절에 나타난 시온의 딸은 예루살렘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예언의 성취자로 오신 왕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즉흥적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철저하고 완벽한 계획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진행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늘에 속한 왕으로서 입성하시지만 자신의 온유함과 비하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이나 마차, 수레를 대기시키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나귀와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 하는 것과 왜 둘을 필요로 하셨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주님은 먼저 나귀를 타셨고, 예루살렘 성 가까이 이르셨을 때 나귀 새끼로 바꿔 타신 것 같습니다.
나귀나 나귀 새끼는 온유와 겸손과 평화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신분적으로 낮다는 것을 의미하기 보다는 온유와 겸손한 성품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왕은 오만한 위엄으로 오지 않으시고, 온순함과 겸손함으로 오셨습니다. 세상의 왕들의 입성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귀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초라한 모습을 보면서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자신을 철저히 낮추셨습니다.
예수님은 싸우거나 경쟁하기 위해 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겸비하고 온유한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하늘에 속한 위대한 왕이셨지만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거나 군림할 의도가 전혀 없으셨고, 온유의 왕, 평화의 왕으로 온 주님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를 원하셨습니다.
프랑스의 위대한 황제였던 나폴레옹(Napoléon)은 최후를 맞이하면서 “나는 무력으로써 세계를 정복해 보려고 했으나 한 치의 땅도 얻지 못하고 말았는데, 십자가에서 죽어간 예수는 벌써 세계를 다 지배하고 있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평생 전쟁을 통해 세계 정복을 꿈꾸었지만 한 치의 땅도 얻지 못했는데, 온유와 겸비와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은 모든 인류를 다스리는 권세와 온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모습을 닮기 원합니다. 바보 같아도, 미련한 것 같아도,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말을 타기 보다는 나귀와 나귀 새끼를 탈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주님은 열렬한 환영을 받으시는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본문 7-8절을 보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은 그들의 겉옷을 나귀와 나귀 새끼 등에 얹어서 주님을 타시도록 했고, 무리들도 그들의 겉옷을 주님 가시는 길에 펼쳐서 겸비하신 주님을 존귀케 했습니다. 옷을 나귀 등에 얹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왕을 영접하거나 왕의 즉위를 나타낼 때 행하는 극적인 예절에 속합니다.
실제로 북이스라엘의 예후가 왕이 될 때에 이런 행위가 있었습니다.
(왕하 9:13)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제자들과 무리들은 몇 벌의 옷밖에 없었을 텐데도 예수님을 존귀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최상의 것을 주님께 드리므로 예수님을 환영하였고, 주님은 그것을 통해서 영광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가진 최상의 것을 주님께 드림으로 주님을 존귀케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어느 때는 죄인이나 세리들로부터, 또 어느 때는 가련한 과부의 두 렙돈 까지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8절 하반절을 보면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합니다. 옷만 편 것이 아니라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폈습니다.
요한복음 12:13-14을 보면 나뭇가지는 종려나무 가지를 가리킵니다. 종려나무는 보통 승리의 상징으로(계 7:9) 주로 왕이 지나는 길에 펴놓거나 그것을 들고 흔들었습니다.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편 것은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승리의 왕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환영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오랜 메시야 대망에 살던 무리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인식하고 그가 당장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올라 이스라엘을 압제와 고통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종려나무는 생명의 풍성한 산출을 누리는 만족을 의미합니다. 종려나무는 감춰진 샘물 속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하늘 높이 치솟아 자라남으로 풍성한 생명을 상징합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승리자요, 생명을 주시는 왕으로 인식하고 주님을 환영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모든 것에 승리자가 되시고,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9절을 보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합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지금 구원하소서’(시 118:25)라는 뜻이고,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칭하는 말입니다.
무리들은 하늘에 속한 왕을 열렬히 환영하면서 시편 118편을 인용하여 “메시야 만세,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를 외치며 찬양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찬양 받으실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무리들은 찬양을 통해서 주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주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요, 자신들을 구원할 유일한 분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주님은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과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신성과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있는가?’,
‘우리는 주님을 위해 우리가 가진 무엇을 드릴 수 있는가?’
‘우리는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길에 펴면서 주님만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받아들이고 주님을 환영하고 있는가?’,
‘우리는 주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시라는 찬양을 진심으로 드리고 있는가?’입니다.
이 시대는 기독교인은 많아도 그리스도인은 적다고 합니다. 교회는 많아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적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1/4 이 기독교인이고, 전 세계 인구의 1/3 이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그중 과연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에게 입성하시는 주님을 얼마나 진정으로 영접하고 있는가를 되새기면서, 예루살렘 입성 당시의 무리들처럼 순전한 믿음으로 주님을 맞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주님은 신성과 주권을 가지신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겸비하고 온유한 평강의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셋째로, 주님은 열렬한 환영을 받으시는 왕으로 입성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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